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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신경영 선언 27주년…삼성, 축제는 커녕 '초비상'

연합뉴스2020-06-07

이건희 신경영 선언 27주년…삼성, 축제는 커녕 '초비상'
이재용 구속 심사 하루 앞두고 삼성 '총력 대비'

(서울=연합뉴스) 김영신 기자 = 이건희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한지 27주년을 맞은 7일 삼성은 '총수 부재'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공교롭게도 8일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의혹으로 구속 심사를 받는다. 만약 이 부회장이 구속되면 삼성은 신경영 선언 27주년에 총수 부재에 따른 혼돈을 맞게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미중 갈등, 한일 갈등 등 각종 대외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다시 구속 기로에 서면서 삼성은 신경영 선언 기념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 서초사옥[연합뉴스 자료사진]
◇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 선언 후 삼성 괄목상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회장직 취임 5년차였던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왔다. 그해 초 미국 한 가전매장을 찾았던 이 회장은 소니, GE 등 제품에 밀려 삼성 제품이 귀퉁이에 밀려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뒤이어 이른바 '세탁기 사건'이 터지며 신경영 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세탁기 뚜껑 부문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직원들이 칼로 깎아내는 모습이 사내방송 몰래카메라에 포착됐고, 격노한 이 회장은 독일 출장에서 임원들을 불러모았다.
이 부회장은 6월7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호텔에서 "바꾸려면 철저히 다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일갈했다.
외형을 중시하는 관습에 빠져 질적 성장에 소홀했다는 위기감을 전 임직원이 공유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대전환하는 일대 계기가 신경영 선언이라는 게 재계·학계의 평가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그야말로 '괄목상대'했다. 이듬해 애니콜 브랜드 휴대전화를 처음 선보였고,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1996년 1기가 D램을 내놓으며 오늘날 세계 반도체·스마트폰 선두 기업이 되는 토대를 닦았다.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하면 가동을 중단하고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하는 '라인스톱제', 불량 무선전화기 15만대를 수거해 태워 없애는 '화형식' 등도 유명한 일화다.
신경영 선언을 기점으로 인사·조직 면에서도 학벌이나 연공서열이 아닌 성과주의가 자리잡고, 여성·지역·국제 인재 양성이 확대됐다.
1993년 자산 40조9천645억원·매출 41조3천646억원이었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자산 802조9천93억원, 매출 314조5천122억원으로 성장했다.
국내외 임직원도 20만명에서 50만명 이상으로 늘었다. 국내에서만 임직원이 10만명을 넘는 등 매년 역대 최대 규모를 경신하고 있다.
주요국 매체들이 선정하는 가치있는 브랜드, 존경받는 브랜드 등으로 매년 선정되고 있기도 하다.
한국경영학회장을 지낸 이장우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1993년 이전까지 한국은 선진국을 모방하며 추격하는 단계였다면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기점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퍼스트 무버'로 거듭났다"며 "신경영 선언은 삼성 뿐 아니라 한국 경제를 바꾼 중요한 일대기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신경영 기념 실종…"이재용이 혁신 바턴 계승해야 하는데"
삼성은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내부에선 각종 악재가 수년째 이어지는 '암흑기'를 맞고 있다는 탄식이 나온다.
2016년 말부터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 연루에 이어 노조 와해 의혹,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삼성바이로직스 회계 의혹 등으로 이 부회장과 주요 임직원이 수년째 수사·재판을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뇌물 혐의로 2017년 2월 구속됐다가 2018년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석방 이후 국내외에서 경영 보폭을 넓혀 갔고, 지난달 초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뉴삼성' 비전을 밝히고 경영 행보에 가속 페달을 밟던 중이었다.
이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통해 이재용 체제 삼성의 혁신 이정표를 제시한 것 역시 부친인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과 연관이 깊다.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가 지난해 10월 재판에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세의 이 회장은 낡고 썩은 관행을 모두 버리고 질을 높이자는 이른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며 "똑같이 만 51세가 된 삼성 총수 (이 부회장의) 선언은 무엇이어야 하겠느냐"고 질문했다.
정 부장판사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노력을 이 부회장이 해야 한다면서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 마련, 재벌체제 폐해 시정 등을 주문했다.

이 같은 '과제'를 받은 이 부회장이 숙고 끝에 내놓은 답변이 준법감시위원회 구성, 노조·경영권 문제 등에 대한 대국민 사과와 새로운 삼성으로의 변화 다짐이었던 셈이다.
삼성을 중심으로 재계에서는 코로나19와 무역갈등 등이 겹친 초유의 상황을 맞은 현재 총수인 이 부회장이 또다시 구속된다면 혁신·성장 동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투자, 신사업 등 굵직한 의사 결정은 총수를 거치지 않고선 어렵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 부회장 구속 기간에 삼성의 대형 인수·합병, 투자 발표는 사실상 중단됐었다. 최근 대형 투자 발표인 ▲ 미래 성장사업에 180조원 투자(2018년 8월) ▲ 시스템 반도체 2030 비전 133조원 투자(지난해 4월) ▲ 퀀텀닷(QD) 디스플레이에 13조1천억원 투자(지난해 10월) ▲ 평택캠퍼스에 최첨단 낸드플래시 생산라인 증설 약 10조원 투자(지난 1일) 등은 모두 이 부회장 석방 이후 이뤄졌다.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의혹으로 기소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외부 전문가로부터 객관적으로 판단 받겠다며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신청한 '최후의 카드'를 꺼낸 것 역시 경영에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는 절박감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재계에서는 "삼성 수뇌부가 수년째 사법 리스크에 허덕이느라 혁신 성장은 커녕 현상 유지도 버거울 정도로 지쳐있다"는 말이 많다. 실제 이건희 회장이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신경영 기념식을 열고 '자랑스런 삼성인상' 수상 등을 하며 임직원 사기를 북돋웠으나, 2017년부터는 기념행사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삼성은 신경영 선언 27주년인 이날도 아무런 기념 없이 8일 이 부회장 구속 심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장우 교수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중대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결국 혁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이 부회장이 그 주인공인데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sh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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